모든 것은 눈앞에 있어, 우리는 손만 뻗으면 돼, 라고 메이비가 말한다. 그 목소리가 귓속에 울려퍼지면 그해 겨울이 생각나고, 그해 겨울을 생각하면 라디오가 떠오른다. 라디오를 생각하면 눈앞으로 다시 메이비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러니까 메이비와 그해 겨울과 라디오는 일종의 삼각주인 셈이다. 강이 운반해 온 모래가 바닷가 어귀에 쌓여 널찍한 삼각주가 되듯, 메이비와 그해 겨울과 라디오는 내 머리 속의 삼각주가 되어 모래사장처럼 편평한 기억의 평지를 만들어놓는 것이다. 모래사장에 누군가 흘리고 간, 반짝이는 동전 하나를 줍는 기분으로, 쌓여있는 기억을 헤집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바로 그해 겨울이었지. 그해 겨울 메이비와 나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 전화를 끊고 나니 피곤했고, 졸렸다. 며칠이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 후의 일들은 사실 자세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살다 보면 기억의 줄기 한가운데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처럼 깜깜한 시기가 있는데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무너져버린 제방을 밟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너무 빨라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의 삶 역시 가속도가 붙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꽝,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 '무용지물 박물관', 김중혁 소설집 <펭귄뉴스>(2006, 문학과 지성사) 중
라디오, 눈을 감고 귀로 느끼는 세상 혹은 눈을 감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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