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珈琲時光 2007/02/19 12:47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2006

<판의 미로>를 작년에 보았었다. 함께 보았던 유진언니는 영화의 지나친 끔찍함 때문에 싫어했지만,
나는 그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좋았다. 현실과 판타지의 병렬적 구성, 그 팽팽한 긴장,
그리고 결국 판타지는 없다는 냉혹한 현실. 그리고 음울하고 차가운 푸른 빛의 화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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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악몽을 꾸었다.

너무나 무섭고 끔찍해서 잠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내 몸은 쉽사리 일으켜지지 않았다.
사무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끔찍한 시위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검고 낮게 깔려 있었고, 전경들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소리를 질렀고, 불이 난 곳에는 소방차가 들어와있었다.
그 끔찍한 곳에서, 사무실 안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리고 나는  서글픈 그러나 무기력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의아해하다가 빈 도시락 통을  씻기 위해 화장실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잠들어서 꾼 꿈에는 그가 등장했다. 그는 여전히 상냥했으나, 이미 모든 것이 달라져있었다.
이미 모든 현실을 다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치러야 할 고통과 아픔이 남아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의 비겁함과 자기합리화의 세계에서 나는 철저하게 고립되고 명백한 남이 되어 있다는 것이
내가 더 감당해야 할 아픔이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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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는 결국 새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오필리아의 힘겨운 마지막 숨소리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오필리아와 그녀의 판타지의 결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악몽에서 깨어나, <판의 미로>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
지하왕국의 공주가 되어 엄마와 아빠를 만나는 오필리아의 판타지 대신,
차가운 바닥에 총을 맞고 쓰러져있는 갸냘픈 그녀의 숨소리가 떠오른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의 마음 속에서도 몇 년간을 쌓아왔던 믿음과 신뢰가 산산이 사라졌다.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것이 슬프다.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긍정적인 순간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니까 나는 도망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 역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몇 년의 시간들을 완전히 폐기처분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냉혹한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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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오필리아 좋아 2007/03/02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더 영리한 잉그릿 버그만 같은 소녀의 얼굴선과 눈이 참 좋았어.
    영화는 정말 끔찍했지만.
    하지만 네 말 하나하나에 동감.
    잔인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영화였어.
    장면 때문이 아니라 난 어쩌면 아직도 현실보다는 판타지에 의존하며 살기 때문에
    속상했었던 게지. ^^

  2. BlogIcon 햄톨이 2007/03/02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난 한 두달, 악몽과 악몽 같은 현실, 그리고 막연한 (그러나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기대를 갖고 지내면서 이 영화가 더 많이 생각났는 듯..
    아, 나에게 예지력이라도 생긴 것인가??? --;; 뭔가 그 때부터 이런 냉혹한 현실이 조만간 닥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