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珈琲時光 2008/10/04 09:28

시네마여인네 모임이 취소되어서, 휴일 근무를 마치고 난 오후 4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망설였다. 생각도 못했던 여유 시간, 뭘 할까?
친구에게 만나서 수다나 떨자고 전화를 걸어볼까, 혼자 영화를 볼까, 아니 머리를 자를까?
연휴로 북적이는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도망치듯 집에 오는 버스를 탔다.
'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난다고 해서 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괜히 영화를 잘못 선택했다가 대화는 커녕 짜증만 가득 쌓인 채 극장문을 나서게 될 수도 있으므로, 어줍짢은 시도가 되려 실망으로 돌아올까봐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무언가가 있는데, 산책을 해도, 술을 마셔도, 개운해지질 않는다.
집에 와서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저녁이지만 동네 공원에 나섰다.
공원에 있는 조그마한 산에 올라갔다. 제법 경사가 진 산이어서 숨이 찼다.
전망대에 올랐을 때는 이미 너무 어두워졌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방향을 택해 내려왔다.
컴컴하고 가파른 경사를 내려와보니 조용하고 한가로운, 낯선 동네였다.
음악을 들으며 집을 찾아, 연휴 저녁의 외식을 즐기는 사람들 속을 지나쳐왔다.
북적대고, 맛있어보이고(-_-), 주말의 저녁은 왁자지껄한 행복함으로 차있다.

오랜만에 한 시간이 넘게 걸었다.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지고, 기분도 한결.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무언가가 조금 엷어졌거나, 잠시 가라앉았거나.

'대화'가 필요하다.
막차 시간에 쫓겨 해야 할 말을 고르고 골라야 하는 아쉬운 대화가 아닌, 
술에 취해 정작 상대방이 던진 중요한 이야기를 깜박 놓치고 망연자실하는 대화가 아닌,
언제 이 이야기가 끝나려나, 조바심 내며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찾는 대화가 아닌,
상대방의 하소연에 마음 속으로 '저도 힘들다구요' 소리치는 대화가 아닌,
당신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전 왜 여기 있을까요 자꾸 자문하게 되는 대화가 아닌.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만큼 쌓여있는 것도 아니다.
간절히 누군가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잔뜩 채워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보세요.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정작 머뭇거리다가 도망칠거면서...

그래도 그래도 대화가 필요하다.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대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흐뭇해지는 그런 대화.
곱씹어보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대화.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


p.s.

언제나 모든 것이 선명하지는 않았는데,
자꾸 '예전에는 모든 것이 선명했는데'라고 생각하며 지금을 자책한다. 이상한 버릇이다. 

나도 별 수 없구나.
나는 잊는 법을 모른다고, 하나도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맞은 편에 앉은 여대생이 읽는 <나의 미카엘>을 봤다.
네 번, 다섯 번은 읽었을텐데 여행 가서 다시 읽어보니 낯설고 난해했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건 여전했다. 다 읽은 후 그곳에 두고 오려 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은.

"1951년의 그 여름에 미카엘은 자신의 논문을 발전시켜서 몇 년 안에 짤막한 독창적인 연구로 출판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단 한마디 격려의 말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바다 밑에서 아주 작은 보석을 잃어버린 상태와 마찬가지로 나는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밤낮으로 고통과, 우울증과, 무시무시한 꿈이었다." 93쪽

"나는 잊는 법을 모른다. 미카엘이 테라 상타의 그 노교수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날,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이며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인가?" 145쪽

- MY MICHAEL by Amos 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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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 CAFE, 2008.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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