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고 그런

珈琲時光 2009/01/23 19:56

과테말라에 있는 명오에게 답장이 왔다.

"일단 내가 먼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게 뭔지 부터 생각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또 우리가 언제 마주 할 수 있을까란 생각에
네가 오는 것은 나한텐 먼저 기쁜 일이라고 말 하며 이야기를 시작 해야 할 것 같다.."

한동안(지금도 여전히) 심각한 무기력과 우울함에 사로잡혀있었다.
사는 게 그렇고 그런 것 같고, 무엇보다 나는 더 그렇고 그런 것 같고,
뭔가 명쾌하고 청명하게 서있어야 할 미래의 계획 따위는 보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이 그저 안으로만 안으로만 파고 들었던 것 같다.
한 살 한 살 꼬박 꼬박 먹는 나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마음이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 척 할 수가 없으니 내가 자꾸 못나 보이기만 했다.

실장님이 4월부터 긴긴 휴가에 들어가는 탓에 서둘러 쓰게 된 한 달의 휴가를 두고
결국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한 채 한 달이 지나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차에
명오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가서 끼칠 폐보다, 좀더 넓고 좋은 집에서 나를 맞이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친구의 마음이 전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어서 오라고 이야기해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그 마음 때문에, 한 발짝도 못 나설 것 같던 선 밖으로 조심스레 걸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마웠다.

관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일찌감치 접고 팔짱을 낀 채 한 발짝 뒤로 물러서거나,
이건 안 되는 일이야 쉬이 단정짓거나,
자꾸만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
뭔가 삶의 전환점을 고민해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했던 다짐들이 이런 저런 일들에 치여 도무지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시들해졌을 때,
내게 남은 건 세상은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고, 도무지 새로울 것이란 없는데
그런데 나는 나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걸까.
나 역시 생활에 치여 눈빛이 희미해지고 말라비틀어진 일상을 부여잡은 채 한숨을 쉬고 있지는 않은걸까. '바쁘다'는 핑계를 위안 삼아 도망만 치고 있는 건 아닌가.
그저 '영리하게만' 혹은 '영악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닌가.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세계에 닿고 싶다는 바람은
20대에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한풀이도 조금 있을테지만,
그보다는 정말 새로운 삶을, 나이들지 않는 아니 제대로 나이드는 삶을 맞을 용기가 있는지
내게 묻고 싶기 때문이다. 확인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오의 편지를 받고, 이제는 드디어 갈 수 있겠구나, 가슴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런 저런 기억들과 여전한 현실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여행을 위해 2년 넘게 모아둔 돈을 고스란히 집에 주고 하루종일 이불 뒤집어쓴 채 울던 밤도,
무심하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던 가까운 사람의 말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 여유있게 선물하지 못한 여유없던 못난 마음들도.
그 비행기값이면 내 1년치 생활비라고 말하는 동료 활동가의 농담 아닌 농담도.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이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직접 만나고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다.
적당히 머물기보다는, 과감히 끈을 놓아버리는 날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꾸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을 이겨서, 삐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게 포기하지도, 단정하지도, 조금 덜 다치겠다고 앞서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관계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준 친구와
가난과 함께 결코 가난하지 않은 마음을 나누어준 친구와
삐뚤어지지 말라고 이야기해준 친구에게 '졸라' 감사!

나 이제 살아난걸까?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현정_세상 끝까지_To the ends of the earth 캔버스에 유채_80.3×116.3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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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가난한 친구 ^^ 2009/01/28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너무 축하한다. 아주 오래전, 네가 영상원에 합격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드네. ^^ 잘 만끽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뿍 마시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어쨌든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봤으면 좋으련만. ^^

  2. 햄톨 2009/01/29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가난한 친구라고 하니깐 슬프잖아...--;;
    2월 말이나 3월에 가니깐 당근 그 전에 봐야지.
    하지만 그곳에 살인사건이 너무 많이 난다고 해서 목적지를 수정해야 할 수도...쩝, 뭐 쉬운 게 없어..--;;

  3. 달고나 kim 2009/01/31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과테말라가 어디야?.. 마치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 가는 것 같아 멋져보이네.(물론 그게 어딘지는 알고있어^^) 나중에 일산에서 뭉치면 과테말라에 대해 얘기좀 들려줘. 조심해서 다녀와.

  4. BlogIcon 햄톨 2009/02/03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네, 아직 목적지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조심해서 잘 다녀올게요.
    달고나만큼은 생생한 글과 멋진 사진은 아니더라도,
    여행가면 저도 흉내라도 내보려구요^^;
    감사해요. 달고나 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