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珈琲時光 2009/11/17 00:42

# 1.

추운 날이다.
엄마 집에 왔다. 엄마 집은, 따뜻하다.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처럼 맛있는 건 없다.
옆에서 수다를 늘어놓던 동생은 지쳤는지 잠이 들어버렸다.
엄마집에 오면 어쩐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받아들면 그저 막막함에 어떻게 풀어내려가야 하나 망연자실하던 내게
수학선생님은 '우선 연필을 들고 써내려가야 문제가 풀린다'며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시곤 했다. 오늘 나비랑 효랑 교육 관련한 회의를 하다가 이 말이 생각났다. 무엇을 하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손을 움직여 펜을 들고 끄적거리다보면 조금은 진도가 나갈 수 있을거라고. 이 말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 버린 건, 나 역시 오랫동안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 그저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 뭔가 손을 놓아버린 것이 분명한데, 언제쯤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한 달의 안식월을 보내고나면 손을 놓고 있던 무언가에 다시 손을 대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솔직히 고작 한 달의 휴가만으로 엄청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거나, 내 인생의 무슨 전환점이라도 발견할 것이라는 거창한 기대를 가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조금은 활기를 찾을 수 있을거라고, 조금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한 달의 안식월이 끝나고는 왠걸, 출퇴근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는 일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해 고생했다. 안식월이 끝날 즈음부터 시작된 3개년 계획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한 나에게 내가 속해 있는 곳의 3년을 내다보고 상상하는 일은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는 일이었다.

'변화와 성장, 목소리, 소통'을 강조하던 나는 정작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늘 고만고만한 실무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다는 생각만 든다. 소통은 커녕,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을 열고 무언가를 털어놓는 것이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진다. 모처럼 아끼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마음에 있는 말들을 쏟아낸 다음 날 아침이면 그렇게 토해낸 말들을 주워담지 못해서, 그 주워담지 못할 말들과 마음에 얼굴이 붉어진다. 오랫동안 마음 먹었던 야마가타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가서는 빼곡이 영화들로만 일주일을 채우고는 쫓기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 가장 편안한 시간은 해가 질 무렵 집을 나서 800미터 정도 되는 얕은 동네 산에 오르는 때.

숨을 헐떡이며 산에 오르면 까마득한 아파트들 뒤로 지는 해가 보인다. 잠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산을 내려와 도서관 뒤편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운다. 정확히 6시가 되면 도서관 사서들이 퇴근을 위해 주차장에 하나 둘씩 나타나고, 가로등이 켜진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과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고즈넉하면서도 한가로우면서도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도 지난 한 달을 돌아보면 그렇게 10분이 넘게 멍하니 앉아있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약간의 방황기를 지나고 이제 다시 출퇴근을 하고, 올해의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회의를 하고, 자료들을 찾아 출력해서 읽고, 메일을 보내는 일들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동안 내가 피했던, 손을 놓고 있었던 질문들은 남아있다. 그 역시 짧고 의미없는 메모들로 여기 저기 조금씩 흩어져있을 뿐이지만, 이제 천천히라도 그것들을 주워담고 손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 2.

예전에 '좀 쿨해질 수 없냐?'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이나 화가 났었는데,
화가 나는 일에 맞닥뜨리면 '쿨해지자'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상대방의 상황이나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마음도 조금 있지만,
대개는 나랑 무슨 상관이람, 남의 일에 내가 열을 낼 필요는 없지, 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

여전히, 지금도, 나는, 내가 쿨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 3.

안식월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의 목록 중 하나가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는 일이었다. <그사세>는 그저 그랬지만, 노희경의 드라마들을 다시, 제대로 보고 싶어졌다. 자그만치 44부작인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를 며칠 동안 내리 보고 또 다른 드라마들을 찾아보는 요즘. 며칠 전 꿈속에 나타난 지연이도, 조만간 산달이 다가오는 연진이도, 영어공부한다고 필리핀에 가있는 언니네 식구들도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우정사의 재호와 신형, 석구와 진숙이모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녀들의 삶이, 그/녀들의 감정이 더 가깝게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이거, 폐인 증상인가 싶지만.... 일단, 바닥을 치고 보자는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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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리 2009/11/20 0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을 놓으면 다시 일에 복귀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난 내 삶의 속도가 어떤 때는 너무 빠르게, 어떤 때는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무서운데.. 일처리 속도는 더뎌지고 개월 수는 팍팍 차고..
    오늘 티비에서 그사세를 재방송 해주기에 마지막회를 우연찮게 다시 봤는데, 그냥, 그랬던 연애시절이 떠올라서 울어버렸어요. 흑.

  2. BlogIcon 햄톨 2009/11/21 0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 뭔가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그냥, 그랬던 연애시절'이란 표현 때문일 듯. '그냥, 그랬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