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珈琲時光 2010/05/08 21:47
어제 곧장 불광동 집으로 퇴근해서 이틀째 집에 있다.
집에 있으면 매끼니 밥은 엄마 아빠가 챙겨주고, 또 딱히 돌봐야할 살림살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여유롭다. 늦잠을 자고, 엄마랑 장을 보고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동네 산책을 하고 드로잉 사이트에서 맘에 드는 그림들을 골라 유심히 살펴본다.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딸래미의 생일을 위해 엄마는 매끼마다 다른 종류의 소고기국을 끓여주었고, 햇빛이 드는 곳에만 놓아두면 잘 자란다는 꽃화분을 선물로 사주었다.
엄마는 요즘 조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부지런히 음식 만드는 일을 배우고, 엄마의 블로그 채우는 일도 열심이다. 아빠는 인터넷으로 건반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하고, 일주일에 며칠씩은 고모가 사는 농장에 가서 쑥과 민들레, 두릅나물을 캐오고, 이번에는 감자와 옥수수도 심었다고 했다. 집 냉장고에는 온통 봄나물이 가득하다. 아빠는 하루 빨리 도시를 떠나 조그마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살고싶어 하신다.
IMF 즈음 아빠가 명예퇴직을 했을 때 엄마와 우리는 하루종일 집에 있는 아빠를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그건 아빠에게도 힘든 일이었을텐데 어쨌거나 그렇게 오랜 시간, 하루 종일 좁은 집 안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고,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나는 그것에 적응하길 포기하고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사는 방법을 택했다. 아빠도 아빠였지만 아빠를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는 일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요즘 엄마 아빠를 보면 함께 지내는 것과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서로 조금씩 익숙해지고 여유로워진 것 같아 조금은 맘이 놓인다. 엄마는 블로그에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했고, 혼자 음악을 듣는 여유도 생겼다. 얼마전 새끼를 낳은 물고기와 꽃을 피워내는 베란다의 화분들 또한 엄마만의 공간에 속한 것들이다. 아빠는 같이 나이 들어가는 아빠의 형제들- 고모들과 삼촌과 친구처럼 지낸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한 시간이 넘게 수화기를 붙잡고 수다를 떤다. 엄마 아빠가 자식들 걱정과 뒷바라지에만 자신들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면 온전히 그럴 수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으로도...

잊지 않고 연진이는 아침 일찍 전화를 해주었다. 곧 퇴근해서 아기 이불 빨래를 해야한다고, 결혼에 대해서는 반반이니 신중하라고 하면서도 아기가 너무 이쁘다고 했다. 싸이월드에 와서 빨리 아기 사진 확인하란다. 나는 연진이가 좋아하던 시장 입구의 영흥약국 아저씨는 이제 약국일을 그만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곧 산달이 다가오는 지연이도 가족들과 할머니를 찾아뵙는 길이라 했다. 다들 직장생활에 더불어 아이와 남편, 시댁 식구들일에 바쁘게 살아간다. 여전히 다르지 않은 내 삶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비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되었다고, 이제 나도 30대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그냥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예기치 않았지만 일정한 변화들이 있었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서른'의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내가 또 다른 삶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것이 내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변화와 그로 인한 공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많이 우울했다. 모두들 여기 없는데,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는데 나 혼자 남아 영흥약국 아저씨의 소식을 전하는, 그런 기분. 이제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과거를 들여다보며 혼자 그리워하는 그런 기분. 뭔가 나 혼자만 덩그라니 남겨져 있는데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우울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자의든 타의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난 지금 여기 있고 지금의 내가 불만족스럽지 않고, 툴툴댈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해야 할, 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

엄마 아빠를 그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기가 쑥스럽다. 조금씩 엄마 아빠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그래도 아직 젊은 모습, 둘이 아웅다웅하는 모습, 열심히 사는 모습. 우리 엄마 아빠를 만나서, 엄마에게서 태어나서 참 좋다!
돈이 생기면 엄마에게는 DSLR 카메라를, 아빠에게는 건반악기를 선물해야지. 빨리 월급받는 날이 왔으면....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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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비 2010/05/25 14: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일축하한다는 이야기도 못하고 지나갔네요. 벌써 25일인데.
    언니. 소풍가자던거. 조만간 실행해요!!

  2. 햄톨 2010/06/09 1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내 블로그에 잘 안 들어와서 이제 봤다는...--;
    글게 벌써 한여름이 되어서, 흑흑.. 소풍이 아니더라도 상암 지역 치킨집 야외마당에서 맥주 한잔 해도 좋을 듯. 아, 맛있겠다!
    요즘은 왜 통 안 보이는거???

  3. 나비 2010/06/22 1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남긴지도 참 오래되었네;
    요즘은 노느라....(그러니까 일하느라가 아니라...술먹느라도 아니라..) 정신이 없어요. 그 동안 노는 근육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었나 봐. 이렇게 놀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