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굳이 날씨 탓으로 돌리자. 봄햇살이 너무 따스했고,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너무 활기찼다.
제사로 북적북적한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회의 하나 끝내고, 사무실에서 보고서 쓰겠다고 폼 잡고 앉아서
하루종일 음악 들으며,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죄다 지워버릴까?
메일도, 채팅의 기록도, 사진도, 기억도, 이미지도... 무엇 하나 남겨두지 말까?
찾으려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2001년부터 주고받은 메일들이 눈에 띄어서 하나 하나 열어봤다.
그 때의 우리는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귀여웠는지?
그 때의 그와 내가 손을 뻗치면 잡힐 것 같아서, 아직도 선해서,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따위의 유치한 물음 대신, 이런 변화를 견디고, 겪어야 하는게 삶이고 인생이라는 영감탱이같은 생각.

싱숭생숭했던 토요일 오후. 미처 다 지우지 못한,
그리고 불필요하게 다시 내 머릿속을 잡아먹고 있는 생각들 때문에,
이런 저런 잡생각들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보낸 한 나절.
이 역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도망치지 않고, 피하지 않고 그냥 겪어야지.
뭉클 뭉클 피어나는 슬픔도, 5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 듯한 흐뭇함도, 풋풋함도,
혼자 삭히고 삭히다 끝내 참지 못하고 터뜨렸던 투정에 대한 반성과 후회도 견뎌야지.
너무나 분명한 건,
우리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와 나는 여전히 그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것,
계속 힘들고 지치고 서로의 고통을 보면서 괴로웠을 거라는 것.
그러므로 그냥 견딜 수 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따위의 바보같은 질문은 꺼내지 않을 수 있다.
빨리 보고서 끝내고, 마음 먹은 논문준비와 놀러다니기! 본격적으로 개시하고 싶다.
그리고 바보같은 생각들은 이제 그만 내다 버려야지.

p.s. 오늘은 아침부터 잠에서 깨어 뒤척였다.
내 행동에 대한 자괴감이 반, 나와 그 자신에게 좀더 노력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은 그의 냉정함과 이기적인
태도로 날 위로하고 합리화하려는 마음 반.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리가 없다.
이럴 땐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할까? 무모한 합리화와 말도 안되는 자기위안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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