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이, 꼭 그 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상황을 곱씹어보고, 돌이켜보면 후회되고, 반성되고, 슬프고 그렇다.
바보같이, 그 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일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래놓고,
몇 시간 후, 혹은 다음 날 부터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다.
그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나는 정말 쿨하게 그러자고 했는데,
정작 그 다음 날부터는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심지어는 가슴 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아서 똑바로 서서 걸을 수도 없었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도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는지 알았다.
미련해진 것인지, 둔해빠진 것인지, 그런다. 요즘, 꼭 한 박자 늦는다.
아무렇지 않게, 아마도 마지막일 대화(라기보다 논쟁)를 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조금 지켜보다 들어왔는데,
그 후유증이 다음 날 아침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면적인 단절을 위한 '시간과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기계가 아닌 이상, 기억이라는게 있는 이상 그렇다고...
하지만, 나의 우울함과 서글픔은 (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냥 더도 덜도 아닌 '내 자신'에 대한 반성과 후회.... 그런거다.
토요일 근무를 하고, 광화문에서 신촌까지 걸어가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를 보았다.
FTA 반대시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전경들은 과도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봄볕은 따스했지만, 시내를 걸어다닐 만큼 좋은 공기도, 좋은 날씨도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이럴 때는 무작정 걷는 것이 약이다. 땀이 나도록 걷다보면, 혹은 음악이나 거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걷다보면,
우울함, 마음 약한 투정들, 잡다한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작년 이맘 때보다 조금 늦은 봄이긴 하지만, 봄은 봄이다. 작년 이맘 때는 <쇼킹패밀리>를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서 고추와 상추 모종을 사와 옥탑방 앞마당에 심었더랬다.
주인집 할머니의 도움으로 무럭무럭 잘 자랐던 고추와 상추들. 이번 봄은 꽃집 앞을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지나친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상영되었다.
아직 첫 번째 이야기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의 상영과 공연만 놓고 본다면
여성영상집단 '움'(WOM)의 작업의 연속선상에 있는 좋은 작품.
작품이 좋았던 것인지, 영화의 주인공들이 용기있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영화와 영화제의 무대 위로 올라오게 한 기획이
좋았던 것인지는 좀더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영화의 상영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온 레즈비언 오디오 액티비스트 그룹 <L FLOWer>와
영화의 세 주인공(쳔재, 초이, 꼬마)이 영화에서 불렀던 랩을 직접 불렀다.
무대의 참여자들은 아웃팅 문제 때문에 마스크를 썼고,
극장의 관객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그리고 열렬히 환호했다.
공연도 좋았고,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드러내기까지
많은 상처와 용기가 필요했을 주인공들이 비록 마스크를 쓰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랩으로, 관객들을 향해 Out!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그러니까 움(WOM)이 말하는 "주인공참여제작방식"이 갖는 힘과 의미는 여기에서 나온다.
거기에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주인공 천재의 엄마는
그래도 딸을 사랑한다고 말해 온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으니....
영화보더 더 감동적이고, 더 짜릿했던 상영+공연+관객과의 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진부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일반적인 질문으로 다른 관객들의 야유와 비난을 받았던 한 관객을 떠올려보면,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는 논쟁적인 작품일 것이다.
나 역시, 좀더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머릿속이 엉클어져서 실마리가 잘 풀리질 않는다.
논문을 쓰겠다고 맘먹고 한 달이 훌쩍 지났으나, 여전히 밀린 일들에 치여 논문은 계속 손을 놓고 있다.
그럴 때마다 수학선생님이 이야기했던 "포도밭"에 대해 생각한다.
<Out!: 이반검열 두번째 이야기> 홈페이지로! www.ou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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