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경주에 다녀왔다.
예정했던 주왕산과 주산지의 근처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 유명하다는 경주의 유적들을 대강이라도 훑어보진 못했지만,
여유롭고 평온했던, 그리고 비가 올 듯 말 듯 고즈넉한 바람과 회색빛 하늘이 좋았던 2박 3일간의 위안.

늦잠을 자버린 덕에 다소 늦게 비내리는 서울을 뒤로 하고 경주를 향해 출발.
<일중독 벗어나기>를 쉬엄쉬엄 읽으며, 비구름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경주에 도착. 자그만치 4시간 반 소요.
각자 바쁜 일정과 컨디션 탓에 쓸쓸히 경주 버스 터미널을 혼자 배회하다가 찾아나선 천마총,
천마총은 사실 별 감흥이 없었고, 처음 보는 모과나무꽃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나무들에 감탄하며 비가 올 듯, 말 듯하는 대릉원 산책.
그리고 장을 봐서 보문단지에 있는 콘도에 도착.
버스에서 내려 보문단지로 들어와 콘도까지 조금 걷는데, 앞에 가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자꾸만 흘깃 흘깃 나를 뒤돌아본다.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좁다란 산책로를 비켜줘야 하는게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경주는 조금만 눈여겨보면, 동네 뒷산처럼 커다란 무덤(릉)을 찾을 수 있고, 그런 유적들 덕분에 도시에서 흔하디 흔한 고층빌딩을 찾아볼 수 없으니,
어딜 둘러보아도, 고즈넉한 산들과 하늘, 기와지붕들이 너무나 평온하고 시원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넓은 하늘을 맘껏 쳐다보고, 바라보고, 음미할 수 있다는 것조차,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둘째 날부터 경주 관광. 오래된 나무들과 유채꽃밭이 펼쳐진 계림이라는 이름의 숲에서 조금 노닥거리다가,  
근처의 석빙고(얼음창고라고 하는데, 창살로 입구가 막혀있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를 살짝 둘러보고,
왁자지껄한 불국사 근처의 리조트로 숙소를 옮기고,
토함산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는 길. 이제야 마음도 트이고, 어딘가로부터 떠나왔구나! 하는 느낌. 하늘 어딘가를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는 그런 터질 듯한 기분.
밖에서 보면 무덤의 봉분같이 생긴 석굴암을 보고(천 오백년이 넘는 그 초연한 미소를 보면서 나도 같이 미소 짓고),
기림사에 들렀다. 불국사처럼 유명한 절은 아니지만, 양쪽의 산과 오래된 목조건물(그 나무 향), 한적한 편안함에서 도무지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던.
기림사에서 나와 감포로 빠져 바다를 잠시 보고(요즘은 어쩐지 바다보다는 산에 끌리고, 산 속에 들어선 절에 끌린다.)
감포항에 들러 (아침의 라면을 빼고는) 하루종일 거른 식사를 때우고 밤하늘을 보면서 또 토함산을 굽이굽이 내려오다.

마지막날 역시, 새벽 같이 주산지의 아침안개를 보겠다던 결심은 온데간데 없이 늦게 일어나 보문단지에서 산책을 했다.
기대도 못했던 큰 호텔(?) 안쪽에 있는 풋 스파에 발을 담그고, 호수까지 산책을 하고. 그야말로 유유자적했던 한 나절.
그럴듯한 점심에 커피까지. 그리고 다시 서울로.

욕족 덕택인지,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목도 약간 붓고, 피곤이 다시 켜켜이 쌓인다.
자꾸만 절이 좋아지는 건 왜일까, 생각하기 전에, 절에서 만난 무수히 많은 불상과 아라한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들을 갖고 있는 것일지, 한번쯤이라도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또 하나는 자전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 다시 한번 경주를 찾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경주를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꼭 버스를 타고, 이번에 못 가본 곳들을 마음껏 가봐야지.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돌아와 생각해보니 나는 그저 나만 생각하고, 아니 다른 사람에게 무심하고 무심하게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쉰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말걸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뜻하게 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 그러나 여행의 기억은 짧고, 여행에서 얻은 위안과 평안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건 아마도 서울의 공기가 너무나 불투명하고, 이곳의 기운이 너무도 센 탓. 그리고 사람을 금세 무너뜨리는 술.

다음주에는 전주, 다음달에는 해남(그 전에 자전거를 배워야 한다), 그 다음달에는 제주도, 그리고 어쩌면 네팔.

이제 제법 수영에 재미를 붙여서 한번이라도 빠지면 몸이 찌뿌둥하고,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고, 좀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데,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논문도 써야 하고, 그러나 내 체력은 늘 고만고만하니...
자주 마시는 술은 아니지만, 아예 금주령을 내려볼까 하는 생각과, 까칠해지지 않기 위해서 좀더 내 자신을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또 이런 저런 생각들.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은데, 왜 주변사람들은 내가 힘이 없어보인다고 하는지,
그건 내게 '믿는 구석'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그랬다면 그 '믿는 구석'이란 뭐였을까? 왜 부질없이 그 따위 '믿는 구석'을 믿었을까?
앞으로는 어떤 '믿는 구석'을 만들어야 할까? 기타 등등.
그러니 이 '믿는 구석'이란 말도, 그저 내가 떠올리고, 내가 생각해낸 것이다. 아마 내겐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는거다.  
이제 별로 나의 상황이 눈물겹지도, 슬프지도, 가슴 아프지도 않지만...
누구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지점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힘들어 하고, 그리고 서로의 맘을 알면서도 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느낄 때면 자꾸 눈물이 난다.
누구나 다 비슷한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는데, 나도 허우적거리느라 정작 뭔가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작스러운 순간에.  

트랙백 주소 :: http://www.hemtory.net/trackback/4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