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珈琲時光 2010/02/03 15:21

현금을 탈탈 털어 모처럼 담배 한 갑을 샀다. 사람들과 저녁도 사먹었다. 일행과 헤어져 월드컵 경기장 역에 들어섰는데, 젠장 카드 지갑을 안 가져왔다. 현금도 한 푼 없고, 교통 카드도 없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바람이 씽씽 부는 밤길을 걸었다.

사실 찬 바람을 맞으며 좀 걷고 싶었다. 상암동에서 합정역까지 그다지 멀어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그냥 정말 오랜만에 무작정 걷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하필 오늘같이 추운 날 걸어가냐며 말린 것도 있고, 나도 살짝 귀찮기도 해서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아, 차라리 잘 됐구나, 생각하며 걸었다. 정말 이렇게 걸어보는 건 오랜만이다. 음악을 흥얼거리며,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을, 얼음같은 바람을 헤치며.

걷다 보면 복잡한 일들이 조금은 단순해지고, 명쾌해진다. 무겁고 버거운 일들도 별것 아닌 일이 된다. 그런데 그러기에, 내 마음의 앙금과 이끼들을 걷어내기에 월드컵 경기장과 합정역 사이의 거리는 너무 짧았다. 걷다 보니 대학생 때 학교에서 종로까지 걸어와 코아아트홀에서 보았던 <나라야마 부시코> 생각도 나고, 학교에서 마음이 허허로워질 때마다 숨어들 듯이 찾아갔던 도서관의 서가도 떠올랐다. 그 때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혼자 풀어내는 방법을 지금보다는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유지할 여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이를 먹고 팍팍한 사회생활을 하며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런 작은 마음들을 못 본 체 지나치거나 혹은 그럴 여유가 없거나,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과의 수다 속에서 풀어냈던 것 같다. 그건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가끔씩 내가 너무 징징대거나 다른 사람에게 많이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어떨 때는 조금 오래 붙들고 있어야 할 마음도 쉽게 떨쳐버리거나, 술 마시고 홀딱 잊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어제는 위로받고 싶었나보다. 나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어디 두고봐라' 하는 마음으로 잘 버틸 수 있다고 믿었는데, 정작 내 마음이 약해진 건 엉뚱한 곳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여러가지 일들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을 현명하게 판단하고 대처하기에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위로 받고 싶었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무엇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은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친구에게 2천원을 빌려서 버스를 타고 오며 소리죽여 울었다. 위로 받고 싶은 마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서글퍼서 울었다. 아직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 슬프다.


2월에는 걸을 일이 많을 것 같다. 아니 많이 더 많이, 더 멀리 걸어야겠다.

이사

珈琲時光 2010/02/01 02:13

정말로 피곤하고 빡빡한 일주일이었다.
지난 주 금요일 처음 소식을 접했던 일주일 전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일주일 동안의 이런 저런 일들을 마치고,
오늘 드디어 사무실의 남은 짐을 모두 정리하고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낯선 공간에 우리의 짐을 옮겨둠으로써 이사를 마쳤다. 단 한 번도 내가 일하는 곳이 없어지거나 (우리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옮겨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곳은 내가 마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 언젠가는 내 스스로 떠나야 할 곳이었다. 이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누군가에 의해 쫓겨나야 하는 곳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안 좋은 소식에 슬퍼하고 주저앉기보다는 '살다보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위기는 기회'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을 잃는 것에 대한 아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지난 5년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 앞으로 해야 하는 일, 좀더 하고 싶었던 일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뿐, 마음을 칠 정도로 후회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그동안 나름 열심히,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곳에서의 5년이 언제나 늘 행복하고 좋았던 건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화목했던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뭐랄까, 5년 동안 지지고 볶고 싸우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보냈던 5년여의 시간이 쌓여있는 두터운 신뢰 같은 것. 미디액트는 나에게 그런 걸 가르쳐줬다.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대로 칼로 잘라내듯이 언제나 그렇게 분명하고 명확하지는 않다는 걸,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현실은 훨씬 더 느린 속도로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변화한다는 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미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과 가끔은 먼저 손 내미는 법까지.

사실 처음 며칠은 무척 감상적이 되어, 아침에 눈을 뜨면 애인과 이별한 사람처럼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무척 담담한 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의 응원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각자의 꿈과 애정이 담긴 공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힘과 그 힘이 가져올 또 다른 큰 힘들이 벌써부터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후퇴하는 게 아니고, 또 그래서 그 때문에 무기력해질 필요도 없으니.

하지만 분명 그리울거다. 광화문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던, 저녁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보여준 창가의 내 자리, 마음이 답답할 때(대부분 촉박한 원고마감을 앞둔 시기)마다 내려가 담배를 피우던 작은 공간, 햇빛을 쬐던 로비, 만만한 엘리베이터, 내 집 화장실보다 더 편안했던 화장실, 회의를 빙자해 수다떨러 나가던 탐 커피숍 등. 커피 한 잔 마시러 혹은 화장실을 이용하러 한번씩 들리던 사람들과의 잠깐 만남과 수다는 또 어떻고...!

내가 일하는 곳도,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새로운 기회, 중요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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