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서재에서'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8/24 김훈, 칼의 노래 1 (2)
  2. 2009/02/25 해변의 카프카
동생은 이 소설이 무척 '재미있다'고 했지만,
나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힘들었다. 중간 쯤 읽다가는 아예 오랫동안 한 쪽으로 치워두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쓰는 일이 기진맥진한 일인데, 읽는 일 역시 마찬가지일 것.  



김훈, 칼의 노래 1 중에서 <내 작품을 말한다> 전문

이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모멸과 치욕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밥을 먹고 숨을 쉰다는 것은, 이가 갈리는 일이지만, 마침내 협잡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계를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 연민과 서정을 모두 걷어낸 자리에서 겨우 드러나는 세계의 알몸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사내의 무기는 언어가 아니라 칼이라야 마땅했다. 나는 나의 언어로 그 사내의 칼빛을 쫓아가기로 했다. 나는 나의 언어가 칼의 삼엄함과 칼의 단순성과 돌이켜지지 않는 칼의 일회성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 소설 속에서 그 사내는 충무공 이순신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젊어서 『난중일기』를 읽을 때,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면서 절망 앞에서 중언부언하지 않는 그 비극적 단순성은 철벽으로 내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때 나는 그 벽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나이 먹은 어느 날 그 사내에 관한 몇 줄의 글을 쓰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나의 문장을 그 사내의 내면의 힘과 울음에 기대었고, 거기에 비벼댔다. 나는 진양조를 버리고, 자진모리나 휘모리까지 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주 기진해서 중모리쯤에서 주저앉았다. 내가 드러내려 했던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겨우겨우 써나갔다. 후반부에서 나는 기진맥진했다. 조금씩 쓰고 많이 잤다.
매일 매일의 불완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일은 눈물난다. 나는 이제 53살이다. 내가 소설가가 될지 뭐가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을 쓰려 한다. 그 이상을 나는 말할 수 없다. 『칼의 노래』를 쓰며 새운 겨울밤들은 춥고 무서웠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2001년 가을 김훈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 만큼이나,
그 사람에 대한 기대도 중요하다.
익숙한 사람들에 대해 무언가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에 대한 기대.
무엇보다 내 자신, 익숙한 믿음이나 편안함도 좋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지, 무슨 일을 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부조차 알 수 없지만,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지만,
같은 노래를 들으며 살고 있구나.
위로라면 위로.

- 작별/헤어짐을 짓는 일을 안고서 시작하기
- 말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문학사상사(2003)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상권, 351, 오시마상)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하권, 171, 다무라군)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나카타 상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말할까, 나카타 상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하고 일일이 아저씨를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나카타상의 일부가 앞으로도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는거야"(하권, 434, 호시노 상)

"나고야를 지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두운 유리창에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도쿄를 떠날 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난다. 나는 숱한 장소에 내리는 비를 생각한다. 숲 속에 내리는 비와 바다 위에 내리는 비, 고속도로 위에 내리는 비와 도서관 지붕 위에 내리는 비, 그리고 세계의 맨 끝에 내리는 비에 대한 생각을.
눈을 감고 전신의 힘을 빼고, 딱딱하게 굳은 근육을 푼다. 열차가 달리며 울리는 단조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따뜻한 감촉을 뺨 위에 느낀다. 내 눈에서 넘쳐 나와 빰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입가에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말라간다. 걱정할 것 없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단지 한 줄기 눈물일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내 눈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옳은 일을 한 것일까?
"너는 옳은 일을 한 거야"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너는 가장 옳은 일을 했어. 다른 어느 누구도 너만큼 잘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너는 진짜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니까 말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 하고 나는 말한다.
"그림을 보면 알게 돼"라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하권, 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