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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편지

珈琲時光 2007/10/27 22:27
가을의 편지

황동규

우리는 정신없이 이어 살았다.
생활의 등과 가슴을 수돗물에 풀고
버스에 기어오르고, 종점에 가면
어느덧 열매 거둔 과목의 폭이 지워지고
미물들의 울음 소리 들린다.

잎지는 나무의 품에 다가가서
손을 들어 없는 잎을 어루만진다.
갈 것은 가는구나.
가만히 있는 것도 가는구나.
마음의 앙금도 가는구나.

면도를 하고 약속 시간에 대고
막차를 타고 밤늦게 돌아온다.
밤 세수를 하고 거울 속에서
부서진 얼굴을 만지다 웃는다.
한번은 문빗장을 열어놓고 자볼까?

- 황동규 시전집 1권 중에서


가을날

珈琲時光 2007/10/20 16:34
가을날

                                                          이성복

자잘한 잎새 사이로 엷은 하늘색 꽃들이 바람에 불릴 때 그는 말했다.
[가을인데 꽃이 피었네요. 이 꽃들이 왜 지금 피는지 모르겠어요. 가령
내게도 흰 줄무늬 여름옷이 있는데, 그걸 봄에 입을 때는 모르겠는데
가을에 입으면 좀 이상해요. 기울기를 이 꽃들은 모르는가봐요.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피는지도 몰라요.]

헤어지면서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나도 그래요. 왠지 나도 그런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엔 몸이 허
공에 뜬 것 같았어요.]

*
손에 들고 있는 책의 구절들을 자꾸 다시 읽는다.
눈은 문자들을 따라가고 있는데, 머릿속은 어딘가를 맴돌고 있어서
자꾸만 문자를 놓치고,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어두침침한 방 창 밖으로 살며시 보이는 하늘은 너무 파아래서,
드문 드문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성큼 다가온 계절을 알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인가) 꽁꽁 묶어 묻어둔 것들이 자꾸 꾸물 꾸물 새어나오려는 것 같아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진부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지난 2월인가, 내가 정말 지독하게도 힘들었을 때 같이 밤버스를 타고 내려가던 날,
계속 질질 짜던 내게 그녀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휴지나 담배를 건네주었는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
그냥 아무 말없이 그러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곁에 있었던 그녀가 참 고맙더라.

비슷한 상황에 처한 그녀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어보아도 그저 까마득하기만 할 뿐.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대면해야 하는 절대적인 삶의 부분이 있다는 걸 다시 절감하게 되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또 조금은 슬픈 채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누구나 한 두번씩은 겪는 일이라 해도, 조금씩은 다른 빛깔과 주름과 기울기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섣불리 일반화하지도, 사는게 다 그런거지라고 쉽게 단정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도, 그녀를 힘들게 하는 상황과 관계들 속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알 수 없는 사정과 고민과 생각과 아픔들이 있을테고,
거기에 어떤 의미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알 수 없을 그 의미들을 그녀가 찾아내고, 그래서 그게 위로가 되고, 조금의 힘이 되면 좋겠다.

한동안 슬픈 음악 금지였는데,
그래도 계절이 계절이니 하면서 눈물이 쏙쏙 나올 노래들만 골라서 듣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