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에서 순창으로, 섬진강을 따라 구례로, 진주로, 그리고 또 통영으로, 거제로, 다시 진주로. 그리고 서울!
따뜻한 햇볕과 봄꽃들과 서서히 그 화려함을 뽐낼, 기세가 등등한 나무들과 바람을 실컷 즐기고 오다.
서울은 비도 내리고, 조금 쌀쌀했다고 하는데
이틀 동안 내가 거쳐간 곳들은 여지없이 "봄날".
화엄사의 진홍색 매화꽃, 발이 아려올 정도로 차갑던 지리산 계곡의 맑은 물, 제주도에 온 것 같았던 거제도의
유채꽃밭,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던, 투명한 통영의 바닷가. 산수유나무, 벚꽃나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나무와 꽃들, 그리고 코끝을 스치던 바람과 봄의 향기들.
서울에서 남원으로, 진주에서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선 내내 오노 요코에 관한 책을 읽었다.
<마녀에서 예술가로 : 오노 요코>(클라우스 휘브너, 솔, 2003)라는 이 책은
<카메라를 든 여전사>(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2005)에 실린 한 꼭지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뭔가 새롭고, 대담한 삶을 꿈꾸어야겠다는 최근 며칠의 생각 때문이었는지,
오노 요코에 대한 이 글이 뭔가 내게 자극을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고,
또 나름 몇 구절은 인상적이었으므로, 망설임없이 책을 구입했다.
아마도 나는 꽤나 많은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이 책을 펼쳐들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비틀즈를 해체시킨 주범, 요부이자 마녀로 질투와 공격의 대상이었언 오노 요코를
전통적 형식을 과감히 던져버린 예술가,
플럭서스와 다다이즘, 해프닝을 실험한 열정적이고 강인한 예술가로 복원하려는
이 책의 의도는 그녀를 "독립적인 예술가"로 바라보기보다는,
여전히 존 레논의 아내로 세상의 주목과 비난을 받은 여자로 가둬두려고 한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만큼 존 레논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오노 요코의 면면들, 존 레논과 함께 한 삶과 예술활동이 대부분 오노 요코의 것이었던 점을
도돌이표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오노 요코의 전기라 할 수 있을(그러나 보통 '전기'가 담고 있는 한 개인의 역사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전기작가의 상상력/추측일까?
책을 읽다보면, 정말이지 오노 요코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듣거나, 그녀의 일기장이나 자서전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 책은,
1933년에서 1966년까지, 1966년에서 1980년까지, 1980년에서 현재까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그녀의 삶과 예술을 보여준다.
첫 번째 시기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뉴욕에서 조형예술가로 활동하던 시기라면,
가장 화려하고 또 새로운 예술적/정치적 실험을 펼쳤던 두 번째 시기는 음악가와 정치 참여 예술가로 활동했던 때로,
이 시기 구분은 존 레논과의 만남과 존 레논의 죽음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그녀가 형식과 관습에 지배되지 않은 자유로운 예술에 도전했고,
어린 시절의 가난과 상처를 통해 강인한 여자로 성장했으며,
(급진적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여성해방투쟁에 앞장서고, 반전평화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벌인 수많은 퍼포먼스들과 시대를 앞서간 그녀의 예술은, 아쉽게도 잘 와닿지가 않는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파란만장한 예술과 삶을 추앙하고 싶어하는,
"마녀에서 예술가로" 승격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존 레논과의 오노 요코의 사랑을 완벽한 것으로 미화하고 싶어하는 이상한 욕망.
그래서 존 레논을 만나기 전까지 오노 요코와 결혼하고 사랑했던 남자들,
그녀의 딸, 그리고 존 레논 이후의 삶과 사랑은 존 레논을 만나기 위한 과정으로만 묘사된다.
혹은 존 레논을 만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시련, 그래서 그 기간의 오노 요코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그리고 존 레논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주도권을 쥐고 강인하며, 현명하다는 평가.
오노 요코에 대한 비판은 오로지 주변 사람들의 질투와 세간의 지나친 관심과 언론의 비열한 과잉보도이다.
읽으면서 제일 화났던 구절. 자신과 비슷한 아시아계 여성 메이 팡을 남편의 노리개로 삼고서,
몇 년만에 존 레논을 다시 찾은 오노 요코가 '주도권을 쥔 승리한 여성'이라니.
"1968년 첫 만남 이후 늘 그래왔듯이 오노 요코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레논은 다시 겸손하게
아내의 뜻에 따랐고 아내의 소망과 조건을 수락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메이 팡은 오노 요코의 손에 놀아
난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제 그녀는 18개월 동안의 (존 레논의) 애인 역할을 그만 두어야 했다. 오노 요코는 승리를
마음껏 음미하였다. 이 삼각 관계에서도 오노 요코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298~299)
약간의 분노와 맹목적인 과찬으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책을 덮으니 서울.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담는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겠으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어떤 순간들과 자꾸만 날조되고, 변색되는 연약한 사람의 기억들을 어느 한 줄에 꿰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였을까?
* 뉴욕에서, 런던에서 어디에서든 오노 요코에게는 함께 작업하고,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들과 교감하고 생각을 나누고, 함께 '작업'을 해나간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좁은 곳에서 한정된 사람들만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니 마음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 <카메라를 든 여전사>에 실린 오노 요코의 글은, 이 책의 요약본이다. 아님 인용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쓴 감상문이다.
물이 말한다
당신은 물이라고
나는 물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통에 담긴 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만나는 이유다
언젠가 우리는 함께 증발할 것이다
하지만 물이 사라진 직후
우리는 아마 물통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기 저것이 나야. 저 물 통 하나가.'
우리는 물통을 지키는 사람이다
- 오노 요코, <<바람의 반쪽 Half-A-Wind>> 카탈로그 중에서
따뜻한 햇볕과 봄꽃들과 서서히 그 화려함을 뽐낼, 기세가 등등한 나무들과 바람을 실컷 즐기고 오다.
서울은 비도 내리고, 조금 쌀쌀했다고 하는데
이틀 동안 내가 거쳐간 곳들은 여지없이 "봄날".
화엄사의 진홍색 매화꽃, 발이 아려올 정도로 차갑던 지리산 계곡의 맑은 물, 제주도에 온 것 같았던 거제도의
유채꽃밭,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던, 투명한 통영의 바닷가. 산수유나무, 벚꽃나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나무와 꽃들, 그리고 코끝을 스치던 바람과 봄의 향기들.

<마녀에서 예술가로 : 오노 요코>(클라우스 휘브너, 솔, 2003)라는 이 책은
<카메라를 든 여전사>(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2005)에 실린 한 꼭지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뭔가 새롭고, 대담한 삶을 꿈꾸어야겠다는 최근 며칠의 생각 때문이었는지,
오노 요코에 대한 이 글이 뭔가 내게 자극을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고,
또 나름 몇 구절은 인상적이었으므로, 망설임없이 책을 구입했다.
아마도 나는 꽤나 많은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이 책을 펼쳐들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비틀즈를 해체시킨 주범, 요부이자 마녀로 질투와 공격의 대상이었언 오노 요코를
전통적 형식을 과감히 던져버린 예술가,
플럭서스와 다다이즘, 해프닝을 실험한 열정적이고 강인한 예술가로 복원하려는
이 책의 의도는 그녀를 "독립적인 예술가"로 바라보기보다는,
여전히 존 레논의 아내로 세상의 주목과 비난을 받은 여자로 가둬두려고 한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만큼 존 레논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오노 요코의 면면들, 존 레논과 함께 한 삶과 예술활동이 대부분 오노 요코의 것이었던 점을
도돌이표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오노 요코의 전기라 할 수 있을(그러나 보통 '전기'가 담고 있는 한 개인의 역사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전기작가의 상상력/추측일까?
책을 읽다보면, 정말이지 오노 요코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듣거나, 그녀의 일기장이나 자서전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 책은,
1933년에서 1966년까지, 1966년에서 1980년까지, 1980년에서 현재까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그녀의 삶과 예술을 보여준다.
첫 번째 시기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뉴욕에서 조형예술가로 활동하던 시기라면,
가장 화려하고 또 새로운 예술적/정치적 실험을 펼쳤던 두 번째 시기는 음악가와 정치 참여 예술가로 활동했던 때로,
이 시기 구분은 존 레논과의 만남과 존 레논의 죽음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상처를 통해 강인한 여자로 성장했으며,
(급진적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여성해방투쟁에 앞장서고, 반전평화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벌인 수많은 퍼포먼스들과 시대를 앞서간 그녀의 예술은, 아쉽게도 잘 와닿지가 않는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파란만장한 예술과 삶을 추앙하고 싶어하는,
"마녀에서 예술가로" 승격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존 레논과의 오노 요코의 사랑을 완벽한 것으로 미화하고 싶어하는 이상한 욕망.
그래서 존 레논을 만나기 전까지 오노 요코와 결혼하고 사랑했던 남자들,
그녀의 딸, 그리고 존 레논 이후의 삶과 사랑은 존 레논을 만나기 위한 과정으로만 묘사된다.
혹은 존 레논을 만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시련, 그래서 그 기간의 오노 요코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그리고 존 레논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주도권을 쥐고 강인하며, 현명하다는 평가.
오노 요코에 대한 비판은 오로지 주변 사람들의 질투와 세간의 지나친 관심과 언론의 비열한 과잉보도이다.
읽으면서 제일 화났던 구절. 자신과 비슷한 아시아계 여성 메이 팡을 남편의 노리개로 삼고서,
몇 년만에 존 레논을 다시 찾은 오노 요코가 '주도권을 쥔 승리한 여성'이라니.
"1968년 첫 만남 이후 늘 그래왔듯이 오노 요코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레논은 다시 겸손하게
아내의 뜻에 따랐고 아내의 소망과 조건을 수락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메이 팡은 오노 요코의 손에 놀아
난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제 그녀는 18개월 동안의 (존 레논의) 애인 역할을 그만 두어야 했다. 오노 요코는 승리를
마음껏 음미하였다. 이 삼각 관계에서도 오노 요코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298~299)
약간의 분노와 맹목적인 과찬으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책을 덮으니 서울.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담는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겠으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어떤 순간들과 자꾸만 날조되고, 변색되는 연약한 사람의 기억들을 어느 한 줄에 꿰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였을까?
* 뉴욕에서, 런던에서 어디에서든 오노 요코에게는 함께 작업하고,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들과 교감하고 생각을 나누고, 함께 '작업'을 해나간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좁은 곳에서 한정된 사람들만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니 마음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 <카메라를 든 여전사>에 실린 오노 요코의 글은, 이 책의 요약본이다. 아님 인용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쓴 감상문이다.

당신은 물이라고
나는 물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통에 담긴 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만나는 이유다
언젠가 우리는 함께 증발할 것이다
하지만 물이 사라진 직후
우리는 아마 물통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기 저것이 나야. 저 물 통 하나가.'
우리는 물통을 지키는 사람이다
- 오노 요코, <<바람의 반쪽 Half-A-Wind>> 카탈로그 중에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