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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29 시간의 부드러운 손
   
시간의 부드러운 손 / 김광규 시집 / 문학과 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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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래 써온 수첩이었다
가족들의 음력 생일과
전셋집 옮겨다닌 날짜
친지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은행계좌와 신용카드 번호 따위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십 년 넘게 지니고 다녀
모서리가 하얗게 해진
이 가죽수첩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 이렇게
평생 간직해온 수첩이나 주소록을
                                         잃어버리는 날이 온다
                                        신경질을 부려도 허망한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
                                         한 생애의 후반기가 시작된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유고시집 / 창작과 비평사 1992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과 책 사이를 오락가락.
아무 걱정 없이, 며칠 전 주문한 책을 옆에 쌓아두고 침대에 누워 빈둥 빈둥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잠들다가, 또 깨어나서.
마흔 셋의 나이에 지리산에서 사고로 타계한 고정희의 시집을 펼쳐들었다가,
마음이 물먹은 휴지처럼 먹먹해져서 아껴두기로 했다.

미성숙하고 덜 자란 어른들, 그 미성숙함을 지식으로 채우고, 논리로 무장한 채 철저하게 자기가 합리화한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어른들,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이어서 다른 사람을 선동하는 힘을 지닌 사람을 볼 때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타고난 똑똑함과 낙관적인 천성 때문인지 나름의 권력을 갖고 있다.)
나의 삽십대 후반, 사십대, 그리고 오십대를 생각한다.
그들에게 맞서거나 대드는 일조차 귀찮고 성가신 일이 되어 묵묵히 쉼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맞장구를 치며, 그들과 같은 언어로 그 세계에 침잠해드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니,
집에 돌아와 잠과 책 속에서 그 이야기들을 곱씹고 있으려니,
그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우리는 과연 그럭저럭? 멀쩡히? 살고 있는지 혹 우리가 흉보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그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다 저녁이 되어서야 알았다. 무심한 그가 그나마 기억하고 챙겼던 기념일.
우리 만난지 5년 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