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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珈琲時光 2007/10/20 16:34
가을날

                                                          이성복

자잘한 잎새 사이로 엷은 하늘색 꽃들이 바람에 불릴 때 그는 말했다.
[가을인데 꽃이 피었네요. 이 꽃들이 왜 지금 피는지 모르겠어요. 가령
내게도 흰 줄무늬 여름옷이 있는데, 그걸 봄에 입을 때는 모르겠는데
가을에 입으면 좀 이상해요. 기울기를 이 꽃들은 모르는가봐요.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피는지도 몰라요.]

헤어지면서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나도 그래요. 왠지 나도 그런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엔 몸이 허
공에 뜬 것 같았어요.]

*
손에 들고 있는 책의 구절들을 자꾸 다시 읽는다.
눈은 문자들을 따라가고 있는데, 머릿속은 어딘가를 맴돌고 있어서
자꾸만 문자를 놓치고,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어두침침한 방 창 밖으로 살며시 보이는 하늘은 너무 파아래서,
드문 드문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성큼 다가온 계절을 알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인가) 꽁꽁 묶어 묻어둔 것들이 자꾸 꾸물 꾸물 새어나오려는 것 같아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진부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지난 2월인가, 내가 정말 지독하게도 힘들었을 때 같이 밤버스를 타고 내려가던 날,
계속 질질 짜던 내게 그녀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휴지나 담배를 건네주었는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
그냥 아무 말없이 그러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곁에 있었던 그녀가 참 고맙더라.

비슷한 상황에 처한 그녀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어보아도 그저 까마득하기만 할 뿐.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대면해야 하는 절대적인 삶의 부분이 있다는 걸 다시 절감하게 되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또 조금은 슬픈 채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누구나 한 두번씩은 겪는 일이라 해도, 조금씩은 다른 빛깔과 주름과 기울기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섣불리 일반화하지도, 사는게 다 그런거지라고 쉽게 단정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도, 그녀를 힘들게 하는 상황과 관계들 속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알 수 없는 사정과 고민과 생각과 아픔들이 있을테고,
거기에 어떤 의미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알 수 없을 그 의미들을 그녀가 찾아내고, 그래서 그게 위로가 되고, 조금의 힘이 되면 좋겠다.

한동안 슬픈 음악 금지였는데,
그래도 계절이 계절이니 하면서 눈물이 쏙쏙 나올 노래들만 골라서 듣고 있다. :)